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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volous, Fabolous

제주도 모터싸이클 다이어리

어쨌든 나도 글을 써서 먹고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일단 남기고 본다. 

나에게 필요한 건 찰나를 꿰는 시간이었다.

지금 이렇게 내려갈기는 글도 긴 맥락에서 찰나겠지만 이 찰나도 언젠가 꿰질 것이기 때문에 하나로 뭉쳐놓는다. 생각할 시간은 정말 없다. 특히 요즘같이 자극적이고 즐거운 일로 가득한 때에는 더욱 그렇다. 변명을 하자면 나처럼 시시각각 

주가 변동을 보고 촌각을 다퉈 기사를 내보내는 사람은 더욱 생각이 결여된다. 

주로 하는 생각은 지금의 시장 대응, 익일기사, 주말에 놀 계획, 술은 뭘 마시지, 누구 만나지, 뭘 더 캐내지, 

자전거 용품은 뭐가 간지나지 등 찰나에 머무르는 것들 뿐이다. 제주행 비행기표 구매도 그렇다. 고민없이 30분만에 클릭. 제주행. 클릭. 김포행. 입사 후 단 한번도 휴가다운 휴가가 없었다. 연휴에 다녀온 도쿄는 추억의 연장이자 객기의 단편이었다. 2년만에 만난 nhk 사람들. 

늘 그렇지만 과거의 사람을 만난다고 과거가 돌아오진 않는다. 제주도는 내겐 도쿄보다도 생경하다. 목적 없는 여행은 전례가 없다. 그렇기때문에 유학, 봉사활동, 선교, 인턴십 등의 목적이 없는 

이 화산섬에 관심을 둘 만한 이유는 전혀 없다. 억지로 목적을 만들었다. 처음엔 뚜르드제주, 즉 자전거 여행. 위험하다는 말에 스쿠터 여행. 'The best mistake I have ever made'란 노래가 이 여행의 주제가다. 너무 많은 파편들이 모여 지금을 이뤘다. #Pre-trip 지난 수요일 나는 거나하게 취하고 싶었다. 어느정도 예상했던 자리였고 나는 속편하게 취했다. 아주 거나하게. 그 자리에서 내 아이폰은 산산조각이 났다. 기억도 산산조각. 대체 내 핸드폰은 어쩌다 깨진거지. 여전히 이 부분의 기억은 행방불명이다. 그날 저녁, 같이 마시고 싶던 사람을 불러내 한잔 더 했다. XY 염색체와 1:1 술자리는 잘 갖지 않는 편이지만 다분히 의도를 갖고 불러냈다. 별다른 일 없이 종료됐고 그에게 내 의중을 충분히 내비쳤다. #Motorcycle diary begins. 여행 첫날 부랴부랴 임대폰을 받았다. 아이폰도 들고나왔다. 임대폰이 늘 그렇듯 배터리가 20%도 되지않는다. 휴대용 충전기조차 고장이다. 일단 가보자. 제주도. 아시아나항공 소형 비행기는 휴대폰 충전 서비스가 없다. 오후 세시반. 스쿠터를 받으러 갔다. 공항에서부터 여기까지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 샌프란시스코 못지않은 야자수 거리, 

하코다테를 상기하는 언덕과 수평선. 아름답고 아름답다. 걷고있을 땐 말이다. 스쿠터도 제법 몰 줄 안다. 2008년에 하노이에 다녀오고 와서는 60cc 쥬드를 산 게 아주 헛짓거리는 아니었나보다. 기술이 인간을 자유케 하리라. 배터리가 없으니 휴대폰 네비게이션 서비스를 이용할 수없다. 스쿠터대여샵과 친구에게 받은 종이 지도를 최대로 활용했다. 물론 결과는 낭패. 제주공항에서 용두암을 찍고 무작정 해변도로를 따라 달렸다. 삼다도. 바람 참 많다. 추워 죽을듯해서 6년 묵은 마크제이콥스 후디를 꺼냈다. 

마크도 6년 묵히면 넝마가 된다. 보온 효과 빵점! 에스웤, 비엠씨 등 기함급 로드를 타는 청춘을 보며 부러움에 몸을 떨었다. 추운 건 바람 때문인지 외로움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빨리 중문까지 가야겠단 생각에 시속 60-70km를 유지했다. 코너 드래프트는 로드 타던 버릇 덕이었을 듯하다. 달리고 달려도 중문이란 단어조차 보이지않는다. 중문에 계신 아버지 친구분이자 펜션 사장님은 평화로라는 산길을 타라고 하신다. 

최대 시속 70km인 도로인데 자동차 평속은 120km/h를 족히 넘는듯하다. 안전제일. 일단 일주도로를 타자. 해질 때쯤 당도한 곳은 금능해변. 협재해수욕장 근처다. 사람의 의지로 못할 일은 없다지만 목숨을 내놓을 의지는 없다. 

눈에 보이는 금능마린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갔다. 천우신조. 여자 침대가 딱 한자리 남았다고 한다. 가격은 단돈 2만원. 돈이 대수니. 목숨이 왔다갔다하는데. 

(적어도 체감으론) 냉큼 들어갔다. 하룻밤에 15만원하는 펜션에 가기엔 기회비용이 크다. 너무 크다. 이날 밤은 기억나지 않는다. 벙커침대 1층에 있던 솔로 여행 여성이 큐티를 참 열심히 했다. 말할 틈도 없이 곯아떨어졌다. #비가 오기 전에 가자 모터사이클다이어리라는 해시태그를 붙인지 이틀째. 게스트하우스에서 아침 먹고 나오고싶었는데 7시가 지나도 주인이 일어날 생각을 하지않는다. 비가 온다던데. 할일도 없고. 일단 head out. 무섭다던 평화로와 지방도로를 '겁나게' 달렸다. 겁이 난건지 겁나 달린 건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틀째 아침 라이딩 내내 머릿속은 겁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타미준이 설계한 방주교회 도착. 노아의 방주를 형상화했다. 1시간을 달려 회수사거리 근처에 있는 오름이야기 펜션에 도착했다. 치와와 수니 잡종 누니 유기견 루니가 맞이한다. 

사모님이 직접 만드신 리코타치즈와 블루베리잼, 토스트 두 조각에 헤밍웨이의 'A Small Good Thing'을 떠올렸다. #그녀가 온다 친한 여자 취재원이 온다. 한 자산운용사의 임원이다. 그녀의 세일즈 능력에 감복했다. 하나, 비가 무지막지하게 오니 택시를 하루 빌려라. 네고를 해라. 다 경림씨를 위해서다. 스쿠터 비 맞으면서 탈거냐. 

안빌릴거면 대안을 제시해라. 그래서 결국 15만원에 빌렸다. 돈은 그녀가 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다. 둘, 전복집에서의 비 맞은 장화신은 고양이 스킬.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데 체통은 개밥으로 주면 적절하다. "서울에서 이 전복먹으러 왔는데.. 너무 배고픈데... 기다려야하나요..." 일행이 있으면 동정심 유발에 지장이 생긴다는 말에 택시안에서 스탠바이. 덕분에 우리는 대기하는 모든 사람들을 제치고 

가장 빨리 먹을 수 있었다. 


#그녀가 떠나고.

그녀가 24시간동안 내게 가르쳐 준 건 첫째, 세일즈 능력, 둘째, 남을 칭찬하는 방법이다. 두번째는 나도 나름대로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정말 칭찬이 몸에 베어 있다. 누구든 춤추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그날 밤의 당신 감귤막걸리와 신라면으로 엠티분위기를 만끽하고 있는데 그 XY 염색체한테 카톡이 왔다. "재밌어요?" '죽겠어요'

오늘은 석모도에 갔다. 재밌었다. 제주도 어떻니. 등등.

휴가 가 있는 여자한테 먼저 재밌냐고 카톡하는 건 분명 관심의 표현이라고. 명백하다고.

올린 인스타마다 눌려있는 Like. 누가 봐도 관심이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죽겠다는 당신. 하룻동안 100km 넘게 탔다고 한다. 영종도 뺑뺑이를 돌았다고.

네가 그렇게 동경하던, 일종의 준거 집단이었던 자전거 동호회에 들어가게 된 너.

이미 일주일이 넘은 상황에서 글을 쓰려니 이미 생각이 희미해졌다.


그러니까, 그날 너는.

이 동호회에는 여신이 참 많다며, 훈남 훈녀 밖에 없다며 그렇게 즐거워했다.

너는 나의 고생, 하루는 궁금해 하지 않은 채 너의 하루에만 흥이 차버렸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너는 그렇다. 찰나의 즐거움에 집착한다. 네가 좋아하는 파티, 명품, 술자리, 여자, 자전거, 주식. 

모두 순간적인 쾌락을 제공하는 것들이다.

SNS도 마찬가지다. SNS에 보이는 건 불과 몇초에 불과하다. 특히 영상이라면 그 이미지가 주는 영향은 그리 오래 가질 못한다. 

나만 유독 그런 건지 모르겟지만 나는 내가 좋아요를 누른 사진이 뭐였는지 하루만 지나면 까먹어버린다.


그 판단이라는 것은 매우 순간적이고 어떠한 사고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던 다른 너

제주도 여행을 떠나기 직전, 카카오프렌즈팝에 빠졌던 나는 무심코 지난해 소개팅에서 만났던 남자에게 하트를 날렸다.

그 사이에도 가끔씩 연락은 했지만 누가봐도 명백히 그가 '까인' 상황이었다.

참 착한 사람. 하지만 외모가, 당시에는 직업이 없다는 이유 등으로 나는 그를 친구 이상으로 두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다.

공대생인 너는 내 깨진 아이폰 액정을 직접 갈아주겠다고 한다. 물론 결국 완전히 리퍼를 받고 -무려 41만원을 주고- 고쳤지만 

어쨌든 마음이 고맙다. 심지어 내가 제주도에 가 있는 동안 미리 액정을 사놓겠다고까지 한다.

그러고는 제주도에 가면 어디어딜 가봐야 한다고도 알려준다.

내가 하루에 대해 툴툴거리면 힘들었겠구나, 고생했구나 등의 말로 위로를 해준다.


철부지인 척 코스프레를 해서가 아니라 오랜만에 누구 앞에서 응석이란 걸 부려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게 fleeting 하는 것들에 집착하는 남자, 그리고 fleeting하는, 찰나에 지나지 않는 순간과 사건사고, 주변 사람 등, 뭉뚱그려 말하자면 그냥 지금 이 순간에 그렇게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 인생은 지나치게 거시적이다. 육을 갖고 사는 시간도 100년이고, 크리스찬으로 말하면 우리 삶은 영원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지금 보이는 것에 보이는 즐거움과 느껴지는 고통에 휘둘리며 거시적인 목적을 간과해버리기 마련이다. 

그래. 그래 이번 여행의 한 획을 그은 그 책의 메시지였다. 


모든 것을 거시적으로 보기. 일단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찰나들을 하나의 실로 꿰어보다

그때 핸드폰이 부서졌기 때문에, 술이 만취가 됐기 때문에 나는 그 남자에게 연락을 했다. (그 남자는 한때 내 친구들이 '블루투스 스피커' 내지는 '파란이빨' 등으로 불렀던 사람이다.) 그리고 불러내서 한잔 더 술을 마시게됐다. 

너와 한잔했기 때문에 너는 내가 너를 남자로 본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고 나도 너를 남자로 다시 한 번 더 보게됐다.

임대폰을 빌린 이유와 그로 인해 내가 배운 건 뭔지 사실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인스타에 더 집중하는 것을 막을 수 있던 이유 중 하나지 않았을까 싶다.

니가 그렇게 중간중간 문자를 보냈기 때문에 나는 온전히 너라는 남자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아이폰이 깨졌기 때문에 누가 나를 진짜 아끼는지, 누가 나에게 단순한 호기심만 갖고 있는지 더 면밀하게 뜯어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놈의 망할 스쿠터.

스쿠터가 있었기 때문에 두 바퀴 달린 원동기의 위험함도 알 수 있었고 그 개고생을 하면서 나의 고생을 진심으로 우려하고 걱정하는 사람이 누군지 배울 수 있었다.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레이싱 에피소드

이미 이주가 지나버린 지금 그때 생각들을 끄집어 내서 쓰려니까 쉽지 않다. 그래서 일단 생각나는 사실들만 나열한다.

마지막날, 진정한 스쿠터 모험을 시작했을 때다.

가방은 이미 무거워질대로 무거워졌고 더이상 시트 밑에 들어가지 않게됐다. 어쩔 수 없이 스쿠터 뒤에 노끈으로 묶었다.

그냥 메고 타도 좋았을 것을.

펜션을 빠져나와 산간 도로, 일주도로보다 하나 더 안쪽에 있는 도로를 무자비하게 달렸다. 최대 속력 제한은 평속 70km인데 이미 나는 70km, 주변에 있는 다른 일반 승용차는 최소한 100km 이상으로 달렸다.

달리고 달려도 쇠소깍은 보이지 않는다. 분명 국민 네비 김기사는 30km 안짝이라고 했는데..

달리는 중간에 웬 덤프트럭이 내 옆으로 다가와 무섭게 소리를 지른다.

'분명 또 계집애가 스쿠터 몰고 있으니까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왔겠지'

들려오는 외침은

'가방!!가방!!'

가방이 뭐 어쨌다고.

일단 세우고 뒤를 돌아봤다. 

노끈에 질질질 끌려오는 나의 나이키 운동 가방.

나이키는 넝마가 돼버렸다.

이를 통해 너덜너덜해진 건 가방뿐만이 아니었다.

'스쿠터로 제주 공항까지'를 결심했던 내 의지도 이미 걸레가 됐다.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래리 오스본 목사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