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rivolous, Fabolous

2017년을 마무리하며




2017년은 성찰과 회복의 한 해였다.


올해는 카뮈의 '이방인'이 새해를 열어줬다. 뫼르소의 모습이 꼭 나와 닮아있었다. 세상일에 별 관심도 없다. 영혼이 안정적이어서가 아니라 냉담해져서 그랬다. 당시 나는 내 방 허공을 떠도는 6면체를 보며 '이것이 평온이야'라는 정신적 허세에 취해있었다.


같은 달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도 다시 읽었다. 여자가 인간으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공간과 돈이 필요하단 얘기다. 이 역시 꼭 나 같았다. 


그리고는 하루키의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로 1월을 마무리하며 '역시 나 같은 지적자본가는 하루키처럼 생각 자유를 위해 한 번씩 떠나줘야 해'라는, 문자 그대로 궤변에 빠졌다.


변화는 1월 말, 2월께부터 시작됐다.


내 힘으로 냉담해진 영혼을 구해내려고 해봤자 할 수 있는 일,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죽으라고 발버둥 쳐봤자 꿈속에서 달음질하는 꼴이었다. 영혼의 차원은 형이하학적, 물리적 현실이 아니다. 3차원의 몸뚱이에 갇힌 내가 어떤 행동을 한들 바뀌지 않는다는 얘기다. 얼어붙은 영혼을 깨부술 새로운 도구가 필요했다.


W.H 오든은 인간이 두뇌, 지식 차원에서의 한계에 봉착하면 종교를 찾는다고 했다. 내 졸업 논문 주제였는데 새삼스레 그 이론이 적용됐다. 나를 맹신했던 나는 무너졌다. 모태신앙이었지만 2014년부터 2016년까지 금융시장 문화의 '중심'에서 돈 뿌리고 술 뿌리던 탕자인 나에겐 다시 아버지 하나님이 필요했다. 탕자가 돌아간다.


올해 총 30여권의 책을 읽었는데 당연하게도 20권이 종교 서적이다. 하나하나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때그때 필요한 은혜가 충만했다.


2월부터 9월까지가 회복의 절정이었다. 조현삼 목사님의 '말의 힘'을 읽으며 우리의 언어습관이 얼마나 죄된 모습을 반영하는지,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떻게 발화해야 하는지를 깨쳤고 김양재 목사님의 저서들을 읽으며 올해 기도제목이었던 '용서하기'를 더 깊게 배울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지금 나는 그때 나를 괴롭게 했던 모든 이들을 감히 용서했다고 말할 수 있다. 생각이 나면 괴롭기는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주는 생각이 아니라 이미 끊어진 목줄을 갖고 그 흔적을 보며 자해하게 하는 사탄의 계략임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기도제목들이 어느 정도 해결되자 연말에, 11월을 기점으로 하나님께서는 방향성을 제시해주셨다. 다소 부차적인 기도제목이었던 비전에 대해서 말이다.


여러 차례 읽긴 했으나 김하중 대사의 '하나님의 대사'를 통해 다시 한 번 빛의 자녀로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정리하고 정성묵씨의 '청년의 시간'을 통해 주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최적 지점(Sweet spot)을 찾길 소망하게 됐다. 같은 기간 크리스천 직장인 모임을 통해 삶과 가치관을 재정비할 수도 있었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은 사실 살점들에 불과하다. 사실 뼈대는 따로 있다. 2017년을 관통하는 뼈대 말이다.


이 모든 회복과 성장 과정의 중심에는, 진짜 사랑을 가르쳐준 사람이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가 우리를 사랑했듯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그 명령을 가장 열심히 실천해나가고 싶은 대상이 생겼단 얘기다.


역시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사랑이다.ㅎ